낚시꾼 소설가 안정효씨가 삽화까지 직접 그린 ‘인생의 월척’을 낚으려는 사람들에 대한 명상
작가 안정효씨의 문학작품들은 체험의 소산이다. 주제와 소재가 다양한 그의 작품 수만큼이나 그의 체험 또한 다종다양하다. 중ㆍ고교 시절엔 만화가 지망생, 대학시절엔 영문학도로서 영어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며, 신문기자로 직장생활을 하던 도중 입대하여 월남전에 지원했고, 작가로 전업한 후에는 여러 차례 TV 및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 진행을 맡기도 했다. 이런 다방면의 체험들은 작품 곳곳에 녹아들어 있다. 그의 대표작『하얀전쟁』 『가을바다 사람들』 『학포장터의 두 거지』 『동생의 연구』 『은마는 오지 않는다』 『미늘』『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세 사람의 고향』 『실종』『미늘의 끝』『지압 장군을 찾아서』 등이 그것이다.
체험의 재구성이란 측면에서 안정효씨의 작품 가운데 독특한 소재 하나는 낚시이다. 70년대 신문기자 시절부터 시작한 낚시 경력이 어언 35년. 특히 전업 작가로서 글 쓰는 일이 많아지고부터는 주말이 되면 만사를 젖혀두고 낚시를 떠난다. 출판계 골수 낚시인들과 강화 석모도로의 주말 낚시 여행은 20여년을 빠뜨림 없이 계속하고 있는 약속 같은 것이기도 하다. 1991년에 발표된 『미늘』과 그에 이은 『미늘의 끝』(2001년)은 그의 낚시 체험에서 우러난 소산이며, 이번에 펴낸 대형 수필집 『인생4계』는 특히 안정효씨의 체험 문학, 낚시 문학의 종합편이라 할 만하다. 그간 소설에서 못 다한 낚시와 삶에 관한 이야기를 수필 형식으로 펼친 이 책은, 그러나 낚시인만을 위한 내용이 아니다. 물고기를 잘 잡고 많이 잡는 방법을 안내하기는커녕, 오히려 덜 잡거나 안 잡는 낚시를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기를 안 잡고도 즐거운 낚시- “그것은 낚시를 통해서 터득하는 인생의 한 가지 계명(誡命)”이며, “비워 놓은 마음을 가득 채우는 기쁨은 욕심을 버리는 지혜에서 시작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작가는 이 책의 머리말에서 “『인생4계』는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순환하는 ‘인생사계(人生四季)’이자, 순환하는 자연에서 지혜를 얻어 그것을 계명으로 삼는 ‘인생4계(人生四誡)’이기도 하며, 철따라 달라지는 풍경 속에서 명상의 세계를 엿보는 ‘인생4계(人生四界)’이기도 하다”고 덧붙인다.
안정효씨가 발표한 많은 작품들 가운데 이 책은 또 다른 작품성을 지닌다. 이 책에 수록된 100여 점의 삽화를 모두 필자가 직접 그렸다는 점이다. “중ㆍ고등학교 때 만화가가 되려던 꿈을 아버지의 호된 반대로 그만 접고 말았는데 이제는 그 꿈을 펼치게 되었다”는 소감처럼, 그간 필자가 틈틈이 그려 둔 유화(油畵) 몇 점을 삽화로 사용하려던 당초의 편집 계획과는 달리, 어느 순간 분출된 그의 소시 적 꿈이 단 5일 만에 100여 점의 삽화를 완성케 함으로써, 이 책은 결국 본문과 표지 장정 부분에까지 작가의 모든 에너지를 담게 되었다. 결국 안정효씨는 이 번 책 『인생4계』를 통해 신문기자, 번역가, 소설가에 이어 삽화가로서, 4번째 직종의 데뷔를 하게 된 셈이다.
낚시는 그 자체가 인생이다 - 그것은 ‘팔순에도 오르가슴을 하는 행위’
낚시란 무엇인가? 왜 낚시를 하는가? 이 같은 질문에 대한 답변을 작가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더러 왜 낚시를 그렇게 좋아하느냐고, 참으로 멍청한 질문을 누군가 했을 때, 나는 로버트 트레이버(Robert Traver)가 말했듯이 ‘그냥 좋아서 한다(I fish because I love to…)’는 대답으로 건성 넘겨버렸다. 그러나 이 설명은 ‘표절’한 내용에 불과할 뿐, 진정 내가 낚시를 좋아하는 까닭은 떼를 지어 산이나 들판으로 나가 삼겹살을 구워먹는 모든 행락(行樂) 가족이나 마찬가지로 ‘바람을 쐬러’ 나가니 우선 즐겁고,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어울려 술과 대화를 나누는 기회가 생겨서 좋고, 집안에 틀어박혀 지내는 생활을 벗어나 여기저기 여행을 해야 하는 핑계가 되어 주기도 하고, 좋은 운동거리여서 건강에도 좋겠고, 거기에다가 덤으로 고기를 낚는 행위에 얽힌 크고 작은 갖가지 즐거움을 얻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낚시는 다른 취미 분야와 달리 혼자서도 즐길 수 있어 좋다’라는 동기 부연 설명과 함께, 낚시의 또 다른 양면성을 열거한다. “아무런 이해관계를 밝히지 않는 듯싶은 낚시 친구처럼 이해관계가 철저하게 일치하는 사람들도 없다. 낚시를 가려고 준비할 때부터 마지막 대를 거두고 철수할 때까지, 함께 나서는 낚시 친구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생각만 한다. … 이렇게 무엇인가를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즐기는 상황은 성(性) 행위와 낚시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골프나 등산도 마찬가지라고 우길지 모르겠지만, 등산과 골프에서는 시원한 입질로 시작하여 물창을 튀는 대물의 얼굴을 보는 순간까지의 오르가슴(orgasme)은 경험하지 못한다. 당구의 절묘한 핵분열에서도 오르가슴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몇 년 전 낚시인들의 망년회에서 원로 조사 한 분이 이런 말을 했다. ‘나이 일흔일곱이 된 지금도 낚시 가자는 말만 들으면 흥분해서 잠이 오지 않는다’고….” - ‘미늘 이야기’ 중에서 - 그래서 작가 안정효씨는 ‘낚시는 팔순에도 오르가슴을 하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이렇듯 삶의 도처와 비유되는 낚시의 의미와 정의를 한데 모아 열거하면 다음과 같이 함축된다. ▶굳이 따지자면 낚시는 그 자체가 인생이다. ▶낚시는 명상이라는 숙제를 위한 여행이다. ▶낚시를 ‘숙제’라고 생각하는 까닭은 ‘휴식이 곧 재생산’이라는 경제 원칙하고도 잘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낚시는 혼자 스스로 즐겁기 위해서 하는 짓이고, 남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 하는 숙제가 아니다. ▶낚시에서의 기다림이란 고통이 아니라, 즐거운 기대감의 시간이다. ▶낚시의 기다림은 무위(無爲)가 아니라, 목적이 뚜렷한 전략이다. 그래서 낚시의 기다림은 ‘노림’이 보다 정확한 개념이다. ▶고요한 물은 소리가 나지 않아서 좋다. 그리고 물이 흐르면 그 흐르는 소리 또한 좋다. 산속의 어둠 속에서 흐르는 물은 침묵보다도 맑고 고요하다. 이렇게 좋은 물을 찾아가 우리들은 낚시를 한다. ▶낚시는 주변 경치가 절반이다. 그리고 풍경에는 소리와 바람도 들어간다. ▶낚시는 팔순에도 오르가슴을 하는 행위이다.
자연과 삶에 관한 성찰 - ‘인생에 낚시를 드리우고…’
안정효의 대형 에세이 『인생4계』는 낚시에 대한 예찬과 삶의 찬미로만 일관하지 않는다. 낚시의 부정적인 행위를 경계하고,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봄으로써, 자연과 인생에 관한 성찰을 도모할 수 있도록 유도하되, 그 형식을 계절의 흐름에 따라 물 흐르듯 자연스레 풀어나간다. “계절의 빛깔이 선명한 시골에서 처녀의 계절 봄이 찾아오면, 자연은 은은한 연분홍빛 꽃잎과 연둣빛 잎으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하고, 물 건너 개나리는 미친 듯한 노란 빛으로 웃는다. 그러면 물가에서 사람들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정수리에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봄처녀와 얘기를 나누려고 사람들은 수선스럽게 물가로 모여든다.” - ‘어부사시사, 봄(春詞)’ 중에서 - “물닭이 사냥을 하느라고 흩트려 놓은 물이 다시 제자리를 잡아 고요해지고, 거꾸로 잠긴 하늘과 구름도 제자리를 찾는다. 한여름 오후는 참으로 길다. 입질이 없으면 더욱 길다.” - ‘어부사시사, 여름(夏詞)’ 중에서 - “가을이 익어가면 모든 열매들이 탐스럽고 아름다운 빛깔로 영근다. 자연은 겨울의 죽음을 맞기 직전에 가장 화려하고 아름답다. 그릇은 가득 차면 비워야 하고, 산은 정상에 오르면 내려가야 하듯이, 만년이 되면 부챗살처럼 펴놓았던 낚싯대를 하나 둘 거둬들이는 느긋한 조사(釣士)처럼, 과거와 현재를 정리함으로써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낚시가 끝났으면 가방을 싸고 떠나야 한다.” - ‘어부사시사, 가을(秋詞)’ 중에서 - “회색과 흰색의 농담(濃淡)만으로 이루어진 겨울 새벽의 풍경은 빛깔이 없는 풍경인 듯싶지만, 알고 보면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색채의 풍경이다. 흑백 단색의 무한한 단순함은 온갖 색채의 화려함보다 그윽하고 아름다우며, 그래서 사진 예술가들은 자꾸 흑백 작품을 만든다.” - ‘어부사시사, 겨울(冬詞)’ 중에서 -
자연의 은총과 혜택을 가장 많이 받는 낚시인들에게 작가는 또, 자연에 대한 사랑을 틈틈이 당부한다. 어둠 속에 앉은 낚시인은 물고기와 함께 밤하늘도 낚고, 별 하나에 생각 하나를 건질 것을 권하는 한편, 그런 자연을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할 것을 당부한다. “우리들은 서울에서 언제 마지막으로 반딧불이를 보았던가? 어린시절 내 고향 개천가에는 초저녁만 되면 반딧불이들이 우수수 날아다니곤 했다. 내 고향 마포에서는 여름 소나기가 한 줄 쏟아지고 나면 아현동 고개 너머로 무지개가 걸렸고, 동네 아이들은 철둑에서 메뚜기를 잡고, 우리들은 송정내로 가서 고기잡이를 하며 놀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모든 추억을 도시에서는 심어주지 못하고, 그래서 사람들은 서울을 ‘고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서울에서는 반딧불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