早春 南道 붕어아리랑

사내호도 고천암도 붙잡지 못한 마음

소박한 연당수로 붕어에게 빼앗기다

| 허만갑 기자 |

남도원정을 떠날 때의 목표는 언제나 거창하다. 일정까지 2박3일로 넉넉하고, 차 트렁크에 보트까지 한 대 실렸다면 기대치는 한껏 부풀어 웃기지도 않게 된다.
“일단 월척은 기본으로 나와야 하고 마릿수까지 좋아야죠. 붕어는 모양과 체색이 좋아야 돼요. 길쭉하거나 허여멀겋다면 덩어리라도 사절입니다. 수질? 겨울이니까 그건 큰 상관없겠으나 찌올림! 요것은 시원웅장해야 하겠어요.”
침을 튀기며 이야기하는 내 모습을 박현철씨는 기가 차다는 듯 물끄러미 바라본다. 지도를 펼쳐놓고 후보지를 물색. 해남 고천암호, 진도 봉암지, 영암호가 물망에 올랐다. 모두 목포-삼호방조제-진도로 이어지는 한 라인에 있으니 여차하면 저차로, 저차하면 여차로 빠지는 운영의 묘를 꾀할 만하겠다.
1월 29일 목포로 출발! 고속도로 상에서 박현철씨가 광주 남부낚시 범희상 사장에게 정보를 묻더니 ‘강진 사내호에서 보트에 붕어가 삼사십 마리씩 쏟아진다’고 한다.
“씨알은 얼마나 된답니까?”
“여덟치가 주종이고 어쩌다 간혹 준척과 월척이 섞인다는군.”
“씨알이 그래서야 긴장감이 없어서 낚시하겠습니까? 4짜 잡으러 고천암호부터 갑시다!”
건방이 아주 하늘을 찔렀다.

▲ 통통하게 살찐 연당수로 붕어들. 7~8치가 주종으로 낚였다.

행선지는 갑자기 고천암호에서 진도로

그런데 우리가 당진을 지날 무렵 창원 세월낚시 서찬수씨의 전화가 왔다. 진도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방송촬영을 해야 하는데 경남 소류지들이 꽁꽁 얼어서 전라도까지 넘어가고 있다. 마침 진도 길은지에 물이 빠져 갈수찬스를 맞았다는데 12월 밤낚시에 준월척이 제법 낚인 후 한 달 동안 묵혀놓았다고 한다. 지금쯤 가보면 좋지 않겠느냐.”
마음이 흔들렸다. 갈수찬스라면 누구보다 좋아하는 우리가 아닌가.
“길은지에 가보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바로 옆의 봉암지로 가보는 것은 어때요? 진도 봉암지 붕어의 때깔이야말로 전국 최고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목적지는 고천암호에서 봉암지로 틀어졌는데, 경험상 목적지가 이렇게 오락가락한 날치고 고기 잡은 날이 어디 있었던가. 그러나 우리는 또 ‘길은지에서 마릿수를 채워놓고 봉암지에서 대물을 노리자’는 식의 시뻘건 김칫국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어둠 속 서해안고속도로를 과속으로 내달렸다.
장장 400km를 달려 자정 무렵에 당도한 길은지(진도군 지산면 길은리, 1만평). 물이 빠져 남은 수면적은 약 7천평? 연안에서 긴 대로 던져도 60cm 수심이 채 안 되는데 바닥은 마사토질로 단단하고 물색이 잔뜩 흐린 것이 던지면 바로 물 것 같은 ‘완벽한 갈수찬스’ 분위기다. 서찬수씨 촬영팀은 도로 건너편 연안에 자리를 잡고 우리는 급한 마음에 보트부터 펼쳤다.
그러나 역시 아직 겨울이라 밤에는 입질이 없다. 결국 남도원정의 서전은 서찬수 팬클럽 ‘천지어인’ 서부지부장 김철씨가 준비한 김치찌개를 안주삼아 두꺼비낚시로 귀결되었다. 
이튿날 아침, 상류엔 살얼음이 얼었고 오전 9시가 넘도록 감감무소식. 보트에서만 6치 3마리가 낚였을 뿐 붕어들은 좀체 움직이지 않았다. 더구나 진도에서 2차 후보지로 예상한 곳들마저 상황이 좋지 않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봉암지에선 보트낚시인 3명이 꽝을 치고 있다는 소식이 입수됐고, 방송촬영팀이 후보지로 봐둔 소류지는 김철씨 일행이 아침에 가봤으나 입질이 없다고 전화가 왔다.
결국 “할 수 없다. 조황이 확실한 사초호(사내호)로 가자”는데 합의를 보고 7명의 대인원이 장정에 들어섰다. 이것이 고난의 행군이 될 줄이야….

길은지, 사내호 찍고 다시 고천암호로…

진도대교를 다시 건너 18번 국도를 타고 해남 쪽으로 가다가 황산면 초입에서 고천암호-백포지로 진입하는 77번 국도로 접어들었다. 구름이 끼었지만 날씨는 온화하여 봄의 정취가 물씬하다. 강진군 북일면 사내호까지는 화산-남창을 지나 60km나 가야 하는 긴 여정이었다. 가다가 남창 기사식당에서 푸짐한 남도백반으로 배를 채우고 사내호에 도착하니 상류는 텅 비어 있고 오른쪽 연안 중하류에 보트 20여 척이 몰려 있었다.
한낮인데도 여기저기 붕어를 올리는 모습이 보여 마릿수 호황은 호황인 듯했다. 그러나 대를 들자마자 힘없이 끌려나오는 모습에 적이 실망. ‘사내호 붕어는 힘이 없다’더니 과연 그랬다. 마침 광주낚시인 백종석씨가 보트를 저어 나오기에 살림망을 들여다보니 40마리의 붕어로 꽉 차 들지도 못할 지경이다. 백씨는 “아침엔 입질이 빗발치더니 지금은 소강상태다. 연안 갈대보다 안쪽 말풀대에서 낚이고 있다”고 했다. 씨알은 7~9치로 모두 고만고만. 월척은 한 마리도 없다. 배부른 소리라 할지 모르지만, 이렇게 균일한 씨알만 끝없이 낚이면 낚시의 긴장미는 떨어지는 법이다. 더구나 붕어들이 모두 호수 가운데 바닥말풀에서 낚여 서찬수씨 팀이 연안에서 붕어를 잡을 확률은 제로상태였다. 사내호 상류의 수로로 가면 연안낚시를 충분히 할 수 있으나 백종석씨는 “상류에선 붕어가 안 낚이더라”고 한다.
결국 붕어연구소 황광인 고문에게 SOS를 청했다. 해남 쪽 조황엔 누구보다 정통한 황 고문은 “고천암호 길호리수로에서 최근 준척급이 잘 낚이고 있으니 가보라”고 추천한다. 그래서 또 이동!
그러나 길호수로 연안엔 100여 명 낚시인들이 진을 치고 있어서 7명이나 되는 우리 일행이 대를 담글 자리는 없었다. 입질도 오후라서 소강상태였다. 장고 끝에 촬영팀은 일단 광주로 철수한 뒤 내일 아침 배를 타고 안좌도로 들어가기로 하고, 나와 박현철씨는 고천암호에 잔류, 작년 2월에 4짜급을 몇 마리 건진 본류에서 보트낚시를 해보기로 했다.
1월 31일 일요일 아침, 고천암호 황산수로엔 빗방울이 날렸다. 아침 8시경 부들 속에서 9치 붕어 한 마리가 낚인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찌는 미동도 없다. ‘차라리 계획대로 본류에서 할 것을…’ 본류의 물색이 맑은 듯해 황산수로로 들어와 봤는데 꽝이다. 250만평 고천암호에서 오직 길호수로만 물색이 흐렸다.

▲ 해남 연당수로 상류 다리 밑에서 낚시하는 장흥의 백남진씨. 오후 1시쯤 와서 두 시간 동안 10여 마리의 굵은 붕어를 낚았다.

▲ 연당수로 중류 두 번째 다리 주변에서 붕어를 낚아 올리고 있다.

▲ 장흥꾼 백남진씨가 연당수로에서 낚은 붕어들을 보여주고 있다.

철수길에 우연히 만난 조그만 바닷가 수로

그렇게 허탈한 마음으로 고천암호를 나와 서울로 올라가는데, 황산면 외입리 들판의 조그마한 수로에 수십 명의 낚시인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웬만한 호황이 아니고선 이 작은 수로에 이토록 많은 사람이 몰릴 리 없다. 한번 내려가 봅시다!”
바다 쪽으로 길게 난 수로는 해남군 황산면 연당리와 남리리 사이에 있었다. 18번 국도에서 연당마을 쪽으로 진입해 굴다리를 통과하면 쉽게 갈 수 있는데, 우리는 그 길을 몰라서 부곡마을 쪽으로 진입해 들판 농로를 지그재그로 헤매다가 겨우 찾았다. 수로 중간 다리에서 해남꾼 한 분을 만났는데, 과연 붕어 씨알이 장난 아니다. 9치 한 마리와 8치 두 마리를 낚아놓고 있다. 그는 “어제는 월척이 많이 나왔는데 오늘은 잘 안 낚인다”며 “큰 씨알을 낚으려면 상류 쪽으로 가보라”고 했다.
시키는 대로 국도와 인접한 상류 쪽 다리에 와서 보니 하류보다 물색이 더 좋고 뗏장과 줄풀이 멋지게 어우러져 있다. ‘왜 이런 포인트를 버려두고 있지?’ 박현철씨는 “전라도 낚시인들은 뻥치기(직공낚시)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수초가 밀생한 곳은 잘 찾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웬걸? 우리가 미적거리는 사이 차량이 한 대 와 서더니 낚시꾼 하나가 먼저 수초대로 내려가 직공채비를 쭉쭉 펼치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7치부터 9치까지 때글때글한 붕어를 순식간에 서너 마리 뽑아 올렸다. 장흥에 사는 백남진씨라고 했다.
“이 수로는 연당마을 밑에 있다고 해서 연당수로라고 부르는데 이 일대에서 초봄낚시가 가장 빨리 되는 곳이오. 보기엔 어설퍼도 붕어가 많아서 꽝이 없고 초봄과 장마철엔 종종 월척이 쏟아지는 곳이지요. 물만 흐려지면 저기 최상류의 남동지 아래까지 붕어들이 올라갑니다.”
나는 왠지 이 수로가 맘에 들었다. 어릴 때 대나무 낚싯대로 붕어를 낚던 시골 바닷가의 작은 수로와 닮았기 때문일까? 2.5칸대를 던져도 건너편까지 갈 만큼 좁은 물길, 의자도 필요 없이 풀밭에 퍼질고 앉아 두 대를 펼쳤는데 세 대째 펴려는 순간 찌가 곱게 솟았다. 힘이 당차다. 노란 비늘에 동글동글 순하게 생긴 7치 붕어.
녀석을 보는 순간 코끝이 찡했다. 사내호에서 더 큰 놈들을 보았을 때도, 광활한 고천암호에서 준척을 낚았을 때도 느끼지 못한 감동이 밀려들었다. 마치 오랜 방랑을 끝내고 돌아와 만난 고향의 풍경처럼, 녀석은 애잔하고 사랑스러웠다.
회색의 하늘이 푸르게 열리면서 빛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물에 젖은 뗏장의 가는 잎사귀가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한 뼘 가까이 솟아 있는 찌! 챔질과 동시에 붕어의 묵직한 몸부림이 심장을 때린다. 녀석을 다시 물속으로 살려 보내고 풀밭에 누우니 햇살은 남도의 벌판을 사광으로 물들이다 내 코끝에 와서 어지러이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