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의 길에 헌신한 志操(지조) 의 정치인 예춘호
이놈의 세상 우울해질 때마다 ‘큰 낚시’를 꿈꾸며 떠나곤 했지요
ㅣ허만갑 기자ㅣ
▲새해에 85세를 맞이한 예춘호 선생. 여전히 정정하였고 '봄에 견지낚시를 같이 가자'며 출조의욕을 보였다.<사진 이기선 기자>
목촌(牧村) 예춘호(芮春浩). 선생은 故 이재학 국회부의장과 더불어 우리나라 정치인 가운데 가장 낚시를 사랑한 분이다.
1927년 부산 영도에서 태어난 예춘호 선생은 6대, 7대, 10대 국회의원으로 격동기의 정치사를 중심에서 이끌며 서슬 퍼런 유신정권과 군부정권에 맞서 한국의 정치 발전과 민주화를 위해 싸웠다. 69년 3선개헌 반대로 공화당에서 제명되고, 80년 신군부가 조작한 내란음모죄에 얽혀 2년간 옥고를 치르는 등 고난의 행로를 걸어 왔지만 그 시련의 세월 속에서도 낚싯대를 손에서 놓지 않고 “낚시를 통해 세속의 오물을 털어내고 맑은 마음을 유지하고자 스스로 애쓴” 분이었다.
3선개헌 반대로 박정희와 결별
부산 동아대 경제학과와 서울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를 수료하고 1962년 민주공화당에 입당한 예춘호 선생은 63년 부산에서 출마하여 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민주공화당 원내 부총무와 사무총장, 상공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올곧은 성격의 그는 장기독재는 부패로 이어질 것이라는 소신 아래 대통령 연임금지조항을 없애려던 3선개헌을 앞장서서 반대하다 공화당에서 제명되었다. 절대권력을 틀어쥔 대통령에 “노”라고 말함으로써 순탄한 미래를 버리고 험난한 가시밭길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비정한 정치판에서 평생 지조와 신의를 지켜온 예춘호 선생의 행보는 세인들이 보기엔 늘 우보(愚步)였다. 친구인 김영삼 총재가 신민당 입당을 간곡히 권유하였을 때 ‘비록 제명되었어도 철새처럼 당적을 바꿀 순 없다’며 고사하였고, 대신 재야인사들의 모임인 국민연합에 가입함으로써 결국 국민연합의 김대중 의장을 돕게 된다. 그로 인해 선생은 정치적 고향인 부산에서 많은 지지층을 잃었고, 나아가 신군부가 꾸민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가담자로 지목되어 모진 고문을 겪고 12년형을 선고받는다. 이후 2년의 옥고를 치르고 석방될 때까지 크나큰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입었다. 1974년부터 1987년까지 20여 회 연행, 10여 회 구류, 50여 회의 연금을 겪었다.
▲69년 3선개헌안 토론 종결일의 국회풍경. 당시 신민당 김영삼 원내총무와 숙의 중인 예춘호 선생. 뒷줄 왼쪽부터 예춘호, 김영삼, 양순식, 김용태, 서민호 의원.
▲64년 박정희 대통령 각 부처 연도순시 현장. 예춘호 선생(사진 중앙)이 공화당 사무총장으로 있을 때다. 박 대통령의 왼쪽은 당시 경제수석비서관이던 김학렬씨다.
선생은 국회에 있거나 재야에 있거나 한결같이 민주투쟁에 매진하였고 입신을 위한 줄 대기나 세를 위한 작당엔 관심이 없었다. 그런 선생의 인품에 매료된 김영삼, 김대중은 모두 예춘호를 우군으로 끌어들이고자 노력하였으나 선생은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두 야당 지도자를 화합시켜 군부정권을 종식시키고자 애썼다.
84년 선생은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을 결성하고 부의장이 되어 김영삼, 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통해 민주진영의 대선 승리를 이루려 분투했으나, 결국 양김의 결별로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깊은 배신감과 좌절감을 느끼고 정치무대에서 은퇴하였다.
이후 산천을 주유하며 은어낚시, 산천어낚시, 견지낚시를 두루 즐겼고 낚시후학에 대한 교육과 집필에 애정을 쏟아 93년부터 95년까지 낚시춘추에 ‘예춘호 낚시학당’을 장기연재하였고, <낚시하는 마음>, <바람을 잡고 고기를 낚고>,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들> 같은 낚시수상집을 저술하였다. 현재 한국사회과학연구소 이사장, 재단법인 영도육영회 이사장으로 있다.
“낚시 갈 때 좀 불러주시오”
지난 2월 6일,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보정동에 있는 예춘호 선생 댁을 방문하였다. 낚시춘추 창간 40주년을 기념하여 준비한 이번 인터뷰엔 예춘호 선생의 오랜 낚시벗인 견지낚시 명인 조상훈씨가 동행했다. 집안엔 은은한 묵향이 감돌았다. 선생은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서 1시간 동안 집안을 소제하고 또 1시간 동안 먹을 간 다음 조반을 드시고 나선 붓글씨를 쓰면서 하루를 시작한다고 한다.
“어서 와요. 오늘은 모처럼 집안이 조용해서 좋구만.”
예춘호 선생은 85세의 연세가 믿기지 않을 만큼 정정하였고 목소리도 쩌렁쩌렁하였다. 사진으로 본 것보다 더 표정이 온화하여 과연 이분이 독재정권에 대항하여 싸운 민주투사가 맞나 싶었다. 명절이라 계속 사람이 드나들었고 전날에도 서울대학교의 386 중진 10여 명이 다녀갔다고 한다.
- 건강의 비결이 있으십니까? 세월이 선생님을 비껴가는 것 같습니다.
“아이고 무슨 말씀. 옛날엔 나도 몸이 좋았는데 지금은 배만 나오고 몸이 무거워져 걱정입니다.”
- 낚시도 한 번씩 다니셔야 하는데 집안에만 계시면 답답하지 않습니까?
“누가 데리고 가줘야지(낚시를 다닐 텐데), 가끔 같이 다니던 낚시친구들은 이제 늙어서 잘 가지 않으려 하고, 조상훈 선생도 요즘엔 날 불러주지 않고… 그래도 늘 집에 있는 것은 아니고 1주일에 두세 번은 외출을 합니다.”
- 주로 누구를 만나십니까?
“정치하는 사람들은 거의 안 만나고 내가 정치할 때 기자로 있던 사람들을 많이 만나요. 서울대학원 동창들과 서예를 하는 사람들도 가끔 만나지요.”
- 봄이 되면 섬진강 누치 견지낚시에 선생님을 모시고 싶다고 조상훈 선생이 말씀하셨는데 한번 같이 나가보시지요.
“좋지요! 낚시 중에 가장 즐거운 순간은 집을 나설 때가 아니겠습니까. 사실 낚시터에 닿아서 낚싯대를 드리우면 벌써 낚시의 고생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뜻하지 않은 온갖 고생을 할 때는 다시는 이 짓 않겠다 맹세하고서도 다음날 새벽이 되면 또 새로운 기대에 부풀어서 낚시터로 출발합니다. 그것이 낚시꾼입니다. 낚시꾼 누구나가 다 그렇듯이 나도 출조 전날은 어린 시절 소풍갈 때처럼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런 흥분된 마음을 느껴본 지도 참 오래 됐네요.”
- 선생님같이 낚시를 사랑한 정치인이 지금 국회에 있으면 정부가 추진하는 낚시관리 및 육성법에 낚시인들을 위한 내용이 많이 담길 수 있을 텐데 아쉽습니다.
“그런데 나도 국회에 있을 땐 낚시인을 위한 정책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요. 처음부터 공화당 원내 부총무로 출발해서 사무총장을 맡았고, 7대 국회에선 상임위원장으로 뛰어다니다보니 낚시 갈 시간도 없었지.”
- 그때는 낚시인구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지요?
“그렇습니다. 그때는 우리나라가 너무 가난했기에 서민들은 낚시를 즐기기 힘들었어요. 내가 공화당 사무총장 할 때가 63년인데 그 해에 우리나라 1년 예산이 겨우 200억원이었소. 지금은 1년 예산이 300조가 넘지 아마? 그래서 국회의원도 가난했어요. 예산이 있어야 봉급을 많이 줄 것 아닙니까. 요즘 뉴스를 보면 정치인들이 거액의 뇌물을 받고 하던데 그때는 뇌물을 줄만한 기업도 없었어요. 당시 의원들이 초청으로 외국에 갈 땐 1등석 항공권이 제공되었는데 돈을 아끼려고 값싼 3등석으로 바꾸곤 했어요. 당시엔 우리나라가 이만큼 살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고, 그런 옛날을 돌이켜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참 큰일을 했구나 거듭 생각하게 됩니다.”
- 3선개헌 반대에 앞장서셨고 그로 인해 재야로 쫓겨나셨는데 박 대통령을 칭찬하십니까?
“3선개헌을 반대한 건 헌법을 수호하고 결국 부패로 이어질 장기집권을 막고자 그런 것이지 박정희를 싫어해서 그런 것은 아니오. 내가 아는 박정희는 애국자였어요. 내가 당 사무총장으로 일한 이삼 년 동안 매일 보고서를 들고 청와대를 드나들었는데 박 대통령은 어떡하면 우리나라를 잘 사는 나라로 만들까 늘 그것만 궁리하던 사람입니다.”
- 선생님의 정치적 동지였던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을 박정희 대통령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내가 볼 때 두 사람은 대통령으로서는 박정희에 못 미치는 사람입니다. 박 대통령은 독재를 했어도 사리사욕은 없었지만 두 사람은 모두 사욕을 버리지 못했어요.”
- 뜻밖이군요. 선생님은 후일 신민당에 입당해 김영삼 총재를 측근에서 도왔고, 김대중 의장과 함께 민주화 운동을 펼치다가 옥고를 치르지도 않았습니까?
“내가 김영삼, 김대중씨에게 실망한 것은 두 사람의 분열로 민주진영이 양단되어 민주정부 수립이 10년이나 늦어졌고, 경상도와 전라도 간 지역감정이 심화되어 오늘까지 이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진정 군부정권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면 84년 대선 때 누군가 한 사람이 양보하여 후보 단일화를 이뤄냈을 것이고 그랬다면 우리나라의 민주화는 훨씬 앞당겨졌을 겁니다.”
- 선생님을 뵙기 전엔 진보 성향이 강한 민주운동가로 여겼는데 말씀을 들어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나는 평생 인권운동에 매진해왔지만 국민의 인권만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도 사랑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진보주의자들이 잘못하는 것은 북한 문제에 대해 너무 인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박정희의 16년 독재는 성토하면서 김일성, 김정일의 60년 독재는 관대하게 봐 넘기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지요.”
격동의 80년 5월, 내란음모죄 수괴로 몰리다
-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입니까?
“10.26 이후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가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실시하며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인들을 구금했을 때 나도 붙잡혀서 고문과 투옥을 겪었을 때겠지요.”
(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피살되자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고 권력은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합동수사본부장인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손에 넘어갔다. 이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육사 내의 영남 출신 모임인 하나회를 중심으로 12월 12일 쿠데타를 일으켜 정승화와 장태완 수방사령관을 강제연행하고 군 주도권을 장악했다. 80년 봄에 신군부는 본격적인 집권 방안을 의논하고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집권 시나리오를 기획했다. 신군부의 야심을 눈치 챈 정치권과 학생 운동권에선 5월 초부터 ‘전두환 퇴진’, ‘민주화 일정 제시’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를 했다.)
“최규하 대통령이 긴급조치 9호는 해제했지만 재야인사에 대한 탄압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당연히 해제해야 할 계엄령은 아무런 이유 없이 계속되고 있었어요. 4월에 들어서자 학생시위가 전국적으로 번지고 있었는데 이런 사태를 외면한 최규하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앙정보부장으로 겸임 발령하는 위헌행위를 감행해 그들의 속셈을 드러내기 시작했지요. 5월 2일 국민연합에서 우선 강력한 민주선언을 하면서 범국민대회를 개최하기로 뜻을 모았는데 문익환, 이문영과 내가 각방으로 뛰어다니며 서명을 받은 뒤 5월 7일에 그것을 발표했어요. 그게 ‘5·7국민선언’으로 뒤에 내란음모사건 조작에 중요 요인이 되었죠. 5월 10일엔 10만명의 학생들이 서울역 광장에 모여 시위열기가 절정에 달했고, 마침내 16일에 김영삼, 김대중의 공동성명으로 계엄 해제, 정치일정 제시, 개헌 확정, 전두환 정보부장 겸임 해제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그때 벌써 주요 관서엔 군경이 진주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어요.”
(신군부는 임시국회가 개회되는 5월 20일 전에 정국을 장악하기 위해 5월 17일 24시에 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일명 5.17 쿠데타)를 단행하기로 결정한다. 그 전에 이미 예상되는 모든 학생 시위에 진압부대를 투입할 계획을 세우고 5월 초부터 20사단, 11공수여단, 7공수여단, 31사단을 서울과 광주, 대전으로 이동했다. 17일 오후 신군부는 대통령과 국무총리에게 비상계엄 전국확대, 비상기구 설치 등을 실시하도록 강요했고 18일 새벽 국회를 점령했다. 그에 앞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를 가택연금하고 김대중, 문익환, 예춘호, 이문영 등 24명을 체포구금하였다.)
“17일은 아침부터 초조한 기분이었어요. 문익환, 이문영과 이런저런 일을 논의하다가 각각 집으로 향했는데 저녁에 한 학생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어요. 지금 각 학교에 기관원이 배치되어 마구잡이로 연행하고 있다, 신변이 위태로울 것 같으니 일단 피신하는 게 좋겠다는 겁니다. 듣고 보니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밤 11시 부산행 막차를 타고 새벽에 부산역에 내렸는데 평소 같으면 마중을 나와야 할 사람들이 안 보이는 겁니다. 그때 낯선 장정 20여 명이 일제히 달려들어 나를 자동차에 끌어다 넣었어요. 비행기를 탄 뒤에야 그곳이 김해비행장임을 알았고 서울에 닿자 눈이 가려진 채 어떤 건물로 끌려 들어갔어요. 눈을 떠보니 창문 하나 없는 흰색 방이었는데 잠시 후 키가 자그마한 녀석이 들어오더니 ‘이 새끼가 예춘혼가? 이 새끼 옷을 벗겨서 꿇어앉혀’하고 소리를 쳐요. 내가 고함을 치고 옷을 벗지 않으려고 버티자 의자에 앉은 내 얼굴을 발로 걷어차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었는데, 그때부터 묵비권을 행사하며 식음을 거절하다 탈진해버렸습니다. 그때서야 그놈들도 몹시 당황하는 것 같았어요. 연행된 지 20일쯤 조서와 진술서를 끝내더니 나머지 30여 일을 의견서 작성에 시간을 보냅디다. 보니까 김대중, 문익환, 이문영과 나를 내란음모 괴수로 정해 서류를 꾸미는데, 각자의 진술이 다르니까 때리고 위협해서 끼워 맞추는 거예요. 20여 명의 말을 맞추어 꾸며대자니 그들 조사관도 할 짓이 아닌 듯 그들 입에서도 나중에는 불평과 욕설이 터져 나오고 있었어요. 30일간 공소장을 수없이 고쳐 쓰는데 온갖 고문을 당하며 억지장단을 맞춰준다는 건 정말 사람으로선 못 견딜 일이었지. 오죽하면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해치우고 빨리 끝내달라고 했을까.”
(예춘호 선생은 정치사를 회고하는 자체가 괴로운 듯 ‘이제 이런 이야기 그만하고 낚시 이야기 합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낚시 얘기를 하다가는 몇몇 사람의 이름이 등장하는 대목에서 번번이 또 정치 얘기로 흘러갔다. 어쩌면 그런 것이 선생의 삶이었겠다. )
▲97년 강릉 북동계곡에서 무지개송어를 낚아 올린 예춘호 선생.
▲71년 11월 8일 제주 차귀도에서 7.5kg짜리 혹돔을 낚아 노익장을 과시한 고 이재학 국회부의장과 함께. 오른쪽이 예춘호 선생.
▲86년 미국에서 돌아온 김대중(오른쪽)의장과 함께 붕어낚시를 떠난 수원 근교의 저수지에서.
평생의 조우 이재학 선생을 만나다
- 낚시는 언제부터 하셨습니까?
“고향이 영도라서 어릴 때부터 바다낚시를 했지요. 옷을 벗어 머리에 묶고 헤엄을 쳐서 영도 동쪽 긴 방파제까지 건너가면 해조류 사이에서 노래미가 많이 낚였어요. 그때는 부산 앞바다에 고기가 참 많았어요. 그러나 본격적으로 낚시를 시작한 것은 돌아가신 동은(東恩) 이재학(李在學) 국회부의장을 만나고부터이지요. 국회에 들어오기 전 이영언 의원의 권유로 부산지역사회개발 위원장을 맡게 되었을 때 이재학 선생을 처음 뵈었는데, 선생은 어렵고 짜증스런 세상사 잊는 데는 낚시만한 것이 없다며 내게 낚시를 권하셨어요. 그래서 선생을 따라 태종대 앞바다에 배낚시를 따라나섰지요. 그 후 선생과 함께 제주도로 돌돔도 낚으러 가고, 소양강(소양호가 생기기 전이었다)에 쏘가리낚시도 갔어요. 징역 살고 나와서는 녹동, 완도, 추자도로 바다낚시도 다니고 섬진강에서 은어도 낚고 봄이면 삽교호에서 붕어도 낚았습니다.”
- 친하게 지낸 낚시친구는 누구입니까?
“방금 말했듯이 내 낚시사수 이재학 선생입니다. 선생은 경성제대 영문과를 나온 당대의 인텔리로 제헌국회를 이끌면서 이승만, 이기붕에 이어 자유당의 3인자로 인정받았던 분입니다. 그런데도 자유당의 부정부패에 과감하게 저항했고 온갖 핍박을 당하면서도 정풍운동을 계속했던 청렴결백한 분입니다. 선생의 고향인 강원도 홍천에 몇 번 따라 갔는데 주민들이 선생님을 존경하고 따르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국민들은 늘 여당에 불만이 많기 때문에 여당 국회의원은 재선되기가 참 어려워요. 그런데도 홍천에서 내리 5선을 하셨어요. 선생은 낚시에 대한 열정은 아무도 따라갈 수 없었지만 신변을 꾸미지 않던 질박한 풍모처럼 낚시솜씨는 좀 떨어졌어요. 하지만 선생은 ‘나는 서툰 낚시꾼에게 정을 느낀다. 지나치게 낚시를 잘하는 사람은 애교가 없다. 나에겐 낚시에 대한 향상심도 경쟁심도 없어서 내 낚시솜씨에는 진보가 없지만 언제까지나 싫증을 내지 않으며 그저 낚아서 즐길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그런 낚시를 하지 못했지만 이재학 선생의 낚시가 낚시의 참모양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선생은 특히 바다낚시를 즐겨서 바다낚시구락부라는 단체도 만들었고 우리나라에도 일본낚시진흥회처럼 명망 있는 낚시인들이 모인 낚시단체가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교통사고로 일찍 돌아가시지만 않았어도 우리나라 낚시계를 위해 큰일을 하셨을 텐데….”
- 바다낚시, 루어낚시, 붕어낚시, 은어낚시까지 온갖 낚시를 두루 즐기셨는데 딱 하나만 선택하라면 어떤 낚시를 고르시겠습니까?
“아무래도 지금까지 즐기는 계류낚시나 견지낚시 중에 하나가 되겠네요. 하지만 가장 짜릿했던 낚시는 이재학 선생과 관탈도에서 즐긴 돌돔낚시였어요. 아, 숭어낚시도 참 재미있는데… 모든 낚시가 다 매력이 있어서 하나만 고르기는 어렵습니다. 1920년대의 일본에 야마다(山田)라는 평범한 함석공 출신이지만 지식층보다 더 인기를 누린 낚시명인이 있었는데 그가 쓴 글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디다. ‘나는 바다낚시를 많이 하는 편이지만 담수낚시 중 납줄개나 붕어낚시는 바다낚시 못잖게 어려운 낚시로서 특별한 매력을 느낀다. 그러나 어느 낚시가 특히 재미있다거나 좋아한다든지 비교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을 뿐더러 남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일이다.’ 나도 그처럼 낚시에 등급을 매기지 않고 자신이 흥미를 느낄 수 있다면 가급적 고루 즐기는 게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 혹시 정치와 낚시의 공통점이 있습니까?
“정치와 낚시는 하등의 연관이 없습니다. 정치인으로서 낚시꾼이라면 대부분 중국의 강태공을 떠올리곤 하지요. 태공망은 권력을 낚겠다는 야심으로 위수 강변에서 곧은 바늘을 드리우고 문왕을 기다렸어요. 그러나 나는 그런 태공망이 낚시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낚시란 고기를 낚고자 하는 목적으로 하는 행위이고 그를 위해 좋은 도구를 구하고 채비를 연구하는 것에서부터 즐거움을 얻는 것인데 고기를 낚고자 함이 아니라 사람을 낚고자 한 태공망의 행위는 낚시를 빙자한 기망일 뿐입니다. 나는 아직도 낚으면 기쁘고 낚이지 않을 때 실망하는 범속의 낚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그게 낚시인 것이지요.”
- 선생님은 최고급 낚싯대를 즐겨 쓰기로 유명했는데 꼭 그렇게 비싼 도구가 필요한가요?
“낚시인의 유형엔 낚싯대를 탐닉하는 사람이 있고 아무 거나 가지고도 낚시만 하면 그만이라는 형이 있지만 낚시 본래의 뜻으로 말하자면 경제적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낚싯대를 탐닉하는 경우가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어떤 낚시이건 그 낚시에 깊이 빠져들수록 더 섬세한 기법을 알게 되고 그 기법을 구사할 수 있게 도와주는 고급 낚시도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지요. 나는 명간(名竿)에 관심이 많아 도사꾸(東作)나 고슈(孤舟) 같은 일본 떡붕어낚싯대의 제조과정을 알아보려 연구하기도 했어요. 나는 낚시를 가면 맨 먼저 그 사람의 낚시도구를 봅니다. 잘 만들어진 낚시도구를 소유하고 채비가 잘 다듬어져 있으면 깊이가 있는 낚시꾼일 경우가 많지만 조잡한 도구를 아무렇게나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배울 만한 부분이 있는 낚시꾼은 아니더군요.”
(인터뷰가 길어지자 부인 황치애 여사가 떡국을 저녁상에 내왔다. 조상훈씨가 맛을 칭찬하자 예춘호 선생은 “이 사람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음식이 예전만 못하다”고 괜한 타박을 하신다. 그러나 사모님의 음식솜씨는 정계에서 유명하여 과거 박정희 대통령이 예춘호 사무총장을 불러 술을 마실 때엔 육영수 여사가 예 총장 집에 차를 보내 사모님을 청와대로 모시고 와서 안주를 만들었다 한다. 황치애 여사도 부산 영도에서 나고 자라 예 선생이 25세, 황 여사는 18세 되던 해에 결혼했다.)
“다시 태어난다면 학자가 되고 싶어”
- 다시 태어난다면 정치를 하시겠습니까?
“정치는 하지 않을 것이오.”
- 그럼 무엇을 하시고 싶습니까?
“학문을 하고 싶어요. 내 아들들이 모두 교수인데 교수란 직업이 돈은 벌지 못해도 꽤 좋습디다.”
(선생은 슬하에 3남2녀를 두었는데 장남 종석씨는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로, 차남 종홍씨는 국민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로, 3남 종영씨는 카톨릭대학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있다.)
- 지난날을 돌아보면 후회스러운 건 없습니까?
“왜 없겠어요. (「초사」 ‘어부’에)유배된 굴원이 남루한 모습으로 강변을 방황할 때 어부가 한 말이 있잖습니까. 성인은 사물에 구애받지 않고 시세에 따른다고 하는데 중인이 다 취해 있으면 함께 취하고 세상이 모두 혼탁하다면 왜 그 흐름에 따르지 않느냐는 고사를 잊은 것도 아닌데, 왜 나만 그리 유별나게 했나 싶은 적도 많아요. 당나라 이욱의 시처럼 봄바람을 가득 받는 조그마한 뱃전에서 한 손에 낚싯대, 다른 한 손엔 가득한 술잔을 들고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았더라면 하는 후회가 있습니다.”
- 마지막으로 여쭙겠습니다. 예춘호 선생님에게 낚시는 무엇입니까?
“세상을 살다 보면 풍상이 따르기 마련이죠. 이런 저런 곤욕을 치르다 울적할 땐 훌쩍 나서던 낚시가 지금은 유일한 취미가 되었습니다. 내가 육군교도소에서 긴 고문의 후유증으로 통증에 시달리고 한 치 앞도 점칠 수 없는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지난 즐거웠던 낚시를 추상하면 얼마간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공판이 시작되고부터는 차입이 가능해졌는데 그때 내가 넣어달라고 당부한 것이 낚시춘추와 낚시수상집이었어요. 다른 글은 읽어나가다가도 어느 사이 머릿속엔 다른 생각이 자리해버리곤 했는데 낚시책만은 그저 부담 없이 즐겁게 읽는 시간을 이어주었습니다. 생지옥 같은 고문과 죽음이 절박해 있는 정적 속에서 내가 꼭 살아서 나가야 할 낙원을 떠올리자 그게 낚시터였어요.”
▲예춘호 선생이 즐겨 쓰는 플라이낚싯대를 조상훈씨에게 보여주고 있다. 낚시도구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선생은 국내외의 명간을 많이 수집하였다.
(선생은 지난날의 조행 중 속칭 대박의 순간을 ‘큰 낚시’라 표현하였다. 아산 영인지의 월척 떼와 서산 창리에서 감성돔 떼를 만나 큰 낚시를 만끽한 얘기를 할 땐 팔순 노안에 홍조까지 띠었다. 그러면서도 관탈도 첫 출조에서 건 6짜(?) 돌돔을 놓치는 대목에 이르러선 “이재학 선생이 뜰채만 잘 댔더라도…”라며 긴 한숨을 토했다. 기분이 묘했다. 권부(權富)를 보장한 대통령의 총애까지 걷어차 버린 사람이 돌돔 한 마리에 대한 미련은 못 버리고 있다니…
“뭐니 뭐니 해도 낚시 갈 때가 가장 즐겁지!”
선생은 가난하고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 정치도 낚시도 마음껏 하지 못했지만 우리는 선생이 몸 바쳐 일으킨 부강한 나라에 살면서 원 없이 낚시를 즐기고 있다. 우리를 배웅하는 선생의 주름진 손을 잡고 마음속으로 큰절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