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령 600호 특별 인터뷰 2


연재소설 씁새 300회 돌파 박준걸
낚시춘추와 동고동락 26년
이영규 기자





▲지난 6월호에 실린 씁새 300회 연재 지면을 보여주는 박준걸 씨. 낚시춘추와 26년 이상 연을 맺고 있는 최장기 필자다.


낚시춘추가 지령 600호를 맞기 한 달 전인 지난 6월호에서 연재소설 씁새가 300회를 돌파했다. 씁새는 1995년 7월호에 첫 연재를 시작해 지금껏 한 번도 빠짐없이 개근하며 독자들에게 웃음과 희망을 선사했다.
필자 박준걸 씨는 1956년생으로 충북 음성에서 태어나 현재는 대전에 있는 국책연구소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직장인이다 보니 주로 주말에만 낚시를 다니고 그 외에는 연차나 월차를 이용해 출조하는 평범한 직장 낚시인이다. 
박준걸 씨는 6.25 때 북에서 피난 내려오신 아버님을 따라 5살 때부터 낚시를 다녔다고 한다. 단순 조력만 따지면 60년에 육박하는 베테랑이다.
박준걸 씨가 낚시춘추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아버님의 영향이 컸다. 지금은 이사를 다니며 다 없어졌지만 낚시광이셨던 아버님은 낚시춘추 창간호부터 사 모으신 열혈 낚시광이셨다고 한다.
그 영향으로 박준걸 씨는 한창 사춘기인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이 선데이서울에 빠져있을 때 홀로 낚시춘추를 애독했고 그 바람에 애늙은이 취급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지난 5월 30일 박준걸 씨가 회원으로 있는 텐피싱밴드의 정출이 격포 앞바다에서 열렸다. 3년 전 인사하고 그동안 통 뵙지 못한 터라 직접 격포로 내려가 함께 낚시하며 씁새 300호 연재의 소회를 들어 보았다.   

  

97년 독자투고란 기고가 필자로서의 첫 인연
낚시춘추 통권 600호와 씁새 300호 연재가 비슷한 시점에 맞아떨어졌습니다. 우선 300호 연재 돌파를 축하합니다. 낚시춘추에 처음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어떤 것이었는지요?


-씁새를 연재하기 2~3년 전 낚시춘추 독자투고란에 글을 써 보냈습니다. 당시에는 독자투고란의 인기가 엄청나 저도 자주 읽던 코너였지요. 그때부터 제 글이 약간 터프했어요. 육두문자도 많이 쓰고 약간 저속해 보이는 속어들도 섞였죠. 그런데 그 글이 인기가 있었어요. 그러자 당시 편집장님께서 다른 글과는 차별돼 재밌다며 후속 투고를 요청했지요. 그때가 첫 인연이었습니다.



▲연재소설 씁새를 집필 중인 박준걸 씨. 직접 출조하며 겪은 낚시터 에피소드를 맛깔지고 코믹하게 풀어내고 있다.

말투와 표현이 거칠어 재밌기도 했지만 초창기엔 독자들로부터 항의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당시의 분위기를 설명해주시죠.
-그럼요, 낚시춘추처럼 고고하고 반듯한 이미지의 잡지에 육두문자가 난무하는 글이 실렸으니 난리가 난 거죠. 심지어 잡지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행위라며 애독자 엽서에 씁새 연재를 멈춰달라는 항의도 있었죠. 그러나 반대 여론이 더 많았습니다. 재밌다! 좀 더 질퍽한 표현으로 욕을 해 달라! 이번호는 욕설이 약하다! 대놓고 열광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요즘말로 표현하면 당시의 호불호 논란이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이 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동행출조 하시는 분들과의 대화가 원래 그렇게 거칠고 저속한 건 아니겠죠?
-꼭 그런 건 아닙니다만, 죽마고우처럼 몰려다니는 개차반낚시회는 좀 심한 편이죠. 하하! 그런데 제가 글을 거칠게 쓰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이 써 보낸 독자투고를 저도 많이 읽었는데 전혀 감흥이 없고 공감도 안 되는 겁니다. 불알친구들끼리 낚시 갔는데 무슨 존댓말이며 표현도 모두 점잖고 철학적이라 실제 낚시터 분위기와는 전혀 매칭이 안 되더라고요. 마치 낚시는 선비처럼 즐겨야 되거나 도를 깨우치는 과정인 것마냥 포장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판을 깬 거죠.

씁새 필자로서의 인기가 가장 높았던 때가 언제입니까?
-아마 90년대 후반 무렵이었을 겁니다. 솔직히 기자님들이 들으면 서운하겠지만 제 주변에는 낚시춘추는 씁새 읽은 재미로 구입한다는 독자들도 무지 많았어요. 책을 사면 꼭 맨 뒤의 씁새 코너부터 읽고 킥킥대던 사람들이죠. 당시에도 낚시춘추는 국내 최고 수준의 낚시잡지였는데 거기에 씁새라는 묘한 녀석까지 더해졌으니 말 다했죠. 사실 좀 더 수위가 높은 소재들도 많았지만 낚시책은 어린 학생들도 보기 때문에 자제했습니다.


유명인사가 되셨는데 그에 따른 에피소드가 있었다면?
-소설은 유명했지만 정작 제 얼굴은 책에 안 나가니 제가 박준걸인 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죠. 다만 제 유명세를 팔아 재미를 본 사람들은 꽤 있었어요. 2000년 초반 무렵 멀리 경남 고성으로 민물낚시를 갔을 땝니다. 현지 낚시점 주인에게 저를 소개하자 깜짝 놀라더군요. 한 달 전 씁새 소설의 작가 박준걸이가 찾아왔기에 너무 반가워 포인트도 직접 안내해주고 점심도 사줬다는 겁니다. 부산에서는 제 유명세를 팔아 낚시점에서 장비를 아주 저렴하게 사간 사기꾼도 있었습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실속은 짝퉁이 챙긴 격이죠.


“낚시춘추 없는 씁새는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낚시춘추에 씁새 연재 후 벌써 26년의 시간이 흐른 현재는 소설 씁새를 모르는 낚시인도 늘어났다. 특히 요즘 젊은 낚시인들은 밴드, 카페, 유튜브 등을 자주 접하다보니 책자에 대한 관심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이 원인일 것이다. 박준걸 씨에게 “과거만큼 알아봐주는 낚시인이 드물어져 서운하지는 않느냐”고 묻자 웃으며 말했다.
“서운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세상은 늘 변하고 내 자신도 변하는 중인데요. 모든 건 물 흐르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흘러가는 게 정상입니다. 다만 지금도 오랜 동안 제 글을 읽어주고 격려해주시는 고정 팬들이 많습니다.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누군가 저를 응원하고 제 글이 세상에 나올 때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저에게는 기쁨이자 행복입니다.”
취재일 박준걸 씨는 오전 10시까지만 해도 내가 탄 배에서는 1등이었다. 그때까지 유일하게 65cm급 농어를 올려 밴드 회원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점심 무렵 물때가 바뀌며 전세가 역전, 등수는커녕 10등까지 주는 본상 후보에서도 미끄러졌다.
겉으로는 “괜찮다, 낚시는 다 이런 거 아니냐”며 웃어보이는 박준걸 씨. 속으로는 제법 서운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마도 다음 달 연재 씁새의 내용은 ‘잘 나가다 막판에 훌러덩 미끄러진 오늘 농어 낚시’가 주제가 되지 않을까?
내가 언제까지 씁새 연재가 가능할 것 같으냐고 묻자 박준걸 씨가 촬영을 위해 들고 온 낚시춘추 6월호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낚시춘추 없는 씁새, 씁새 없는 낚시춘추는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제 힘이 닿는 날까지는 낚시춘추 독자들과 함께 할 생각입니다. 낚시춘추와 동고동락한 26년은 내 인생 최고의 만남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계속 낚시를 다녀야겠지요? 제가 매 주말 와이프 눈치를 슬슬 봐가며 낚시터로 향하는 변명이자 이유입니다.”    

▲낚시를 마친 박준걸 씨가 쿨러와 낚시가방을 들고 철수하는 모습. 민물낚시와 바다낚시를 모두 즐기는 전천후 낚시인이다.